인치(inch) vs 센티미터(cm)
우린 분명 미터법 국가인데...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미터법을 지키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키는 175cm, 거리는 10km, 몸무게는 70kg이라고 하죠. 미국인들이 "I'm 5 foot 10"이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바로 계산기를 두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유독 절대 미터법을 안 쓰는 분야들이 있습니다.
- "이번에 65인치 TV 샀어!"
- "살쪄서 허리가 32인치가 됐네."
- "이 차 휠이 19인치야."
- "서브웨이 12인치(동서남북) 샌드위치 주세요."
도대체 왜 이 분야들은 cm 대신 인치를 고집하는 걸까요? 오늘은 인치의 낭만적인(?) 역사부터 현대 기술 속에 숨어있는 인치의 비밀까지 파헤쳐 봅니다.
1. 왕의 엄지손가락? 인치(Inch)의 유래
12분의 1의 마법 (Uncia)
'인치(Inch)'라는 단어는 라틴어 **'운시아(Uncia)'**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12분의 1'**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1 푸트(Foot, 발 길이)가 12인치이므로 딱 맞아떨어지죠. 참고로 무게 단위인 '온스(Ounce)'도 같은 어원(1/12 파운드)에서 나왔습니다.
보리알 3개와 에드워드 2세
옛날 단위들은 대부분 신체 부위에서 나왔습니다. 인치는 전통적으로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너비(폭)**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엄지 크기가 다르니 상거래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았겠죠?
그래서 14세기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2세가 교통정리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1인치는 보리 알갱이(Barleycorn) 3개를 세로로 잇달아 놓은 길이로 한다!" 왕의 명령으로 보리알 3개가 1인치가 되었습니다. 다소 황당해 보이지만, 당시 농경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가장 일정한 규격이 곡식 알갱이였기 때문에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흘러 1959년이 되어서야 전 세계는 1인치 = 2.54cm라고 과학적으로 합의하게 됩니다.
2. 왜 TV와 모니터는 아직도 인치인가?
디스플레이의 종주국, 미국
TV나 모니터 크기를 잴 때 대각선 길이를 인치로 부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디스플레이 산업의 초기 표준을 미국이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GE, RCA 같은 미국 기업들이 TV를 대중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치 단위를 썼고, 이후 LCD, OLED로 기술이 발전하면서도 공장 규격(유리기판 사이즈)이 인치 기반으로 굳어졌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도 '8인치 웨이퍼', '12인치 웨이퍼'라는 말을 쓰죠? 기술의 원천이 미국 기반이라 그렇습니다.
법적으로는 cm를 써야 한다?
재미있는 점은 한국 법(계량에 관한 법률)상 상업적 광고나 표시에 비법정계량단위(평, 인치, 돈 등)를 사용하면 과태료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전 매장에 가보면 제품표에 "65인치"라고 대놓고 쓰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표기합니다.
- 163cm (대각선 길이)
- 65형 / 65Type
"인치"라는 글자만 뺐을 뿐, 사실상 소비자와 판매자 모두 암묵적으로 인치로 소통하고 있는 셈이죠. 규제와 관습의 기묘한 동거입니다.
화면 크기의 함정 (16:9 vs 21:9)
단순히 인치 수만 보면 화면 크기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인치는 대각선 길이만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같은 32인치라도 화면비율에 따라 실제 면적은 다릅니다.
- 16:9 (일반 모니터):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와이드 화면
- 21:9 (울트라 와이드): 옆으로 아주 긴 화면. 대각선이 길어서 인치 수는 크지만, 위아래 높이는 훨씬 낮아서 실제로는 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3. 허리 사이즈와 바지의 진실
30인치 바지 ≠ 허리 30인치
옷 살 때 "나 허리 30이야"라고 해서 30사이즈 바지를 샀는데 꽉 끼거나 헐렁한 경험, 있으신가요? 이는 브랜드마다 **'바니티 사이징(Vanity Sizing)'**을 하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실제로는 32인치 크기의 바지에 '30'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이죠. "어머, 나 아직 30 입네?"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 기법입니다. (주로 여성복보다 남성복이나 SPA 브랜드에서 심합니다.)
그래서 인터넷 쇼핑 실패를 줄이려면:
- 내 허리를 줄자로 잰다 (cm).
- 2.54로 나누어 인치를 구한다.
- 쇼핑몰 실측 사이즈표에서 '허리 단면' 길이를 확인한다. (단면 × 2 ≈ 둘레)
단순히 "나 30 입어"만 믿고 샀다가는 반품비만 날릴 수 있습니다.
4. 실생활 빠른 변환 꿀팁
정확한 계산은 1인치 = 2.54cm이지만, 암산할 땐 이렇게 하세요.
"곱하기 2.5" 법칙
인치에 2.5를 곱하면 얼추 맞습니다. (4% 정도 오차가 있지만 일상에선 충분합니다)
- 10인치 ≈ 25cm
- 20인치 ≈ 50cm
- 40인치 ≈ 100cm (1미터)
자주 쓰는 물건 크기
- 신용카드 긴 변: 약 3.3인치 (8.5cm)
- A4 용지: 긴 쪽이 약 11.7인치, 짧은 쪽이 8.3인치
- 서브웨이 샌드위치: 풋롱(Footlong)은 12인치(약 30cm), 하프는 6인치(약 15cm)
- (TMI: 한때 미국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실제 11인치밖에 안 돼서 소송 걸린 적도 있습니다!)
마무리
인치는 알면 알수록 재밌는 단위입니다. 왕의 엄지손가락에서 시작해 최첨단 스마트폰 화면까지, 수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살아남았으니까요.
이제 마트에서 "이 모니터 27형이에요"라고 적혀 있어도 "아, 27인치(약 68cm)구나" 하고 바로 이해하실 수 있겠죠? 정확한 변환이 필요할 땐 언제든 ConverterGo를 찾아주세요.
